최근 포토로그


(기획회의)사표 쓰는 법: 이제 그만 쉬고 싶다는 그대에게 편집자 되기

격주간 <기획회의> 제416호에 '절대적이고 상대적인 편집자 매뉴얼' 06회 분으로 게재됨.

사표 쓰는 법: 이제 그만 쉬고 싶다는 그대에게



편집자는 그런 일이다

내 주변의 경우를 보면, 출판 편집자는 오래 일한 사람일수록 만족도가 높은 직업이다. 왜? 다른 이유도 많겠지만 우선, 우리가 다루는 원재료가 저작자가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원고라는 데 있을 것이다. 또 책을 만드는 과정을 겪어 보았다면 알겠지만 혼자서 할 수 없는 일이고, 반드시 누군가와 함께해야 하는데, 그들의 노력이 내 업무에 수렴되어야 하는 하는 일이라는 것이고(나는 책임 편집자다!), 그들 역시 전문가라는 것이다. 당연히 저자가 그렇고, 번역자가 그렇고, 일러스트레이터나 사진가, 디자이너, 지업사나 인쇄소, 제본소의 사람들, 데이터를 디지털로 분해하는 사람……, 직접 만날 일이 별로 없지만 생각해 보면 표지 후가공을 하는 사람도 있다. 그렇다 뿐인가. 내가 만든 책에는 반드시 독자가 있다! 그들은 지갑을 여는데, 그저 소비자라고 불러 버릴 수 없는 독특한 지위를 가진 이들이다. 책을 읽었거나 읽을 이 사람들이 직간접적으로 내가 새로 만드는 책에 관여한다. (심지어 저자도 독자다!) 그리고 우리 자신이 책이라는 상품이 만들어지고 팔리는 모든 과정에 기여하고 관여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전 과정을 한 사람의 편집자가 운영할 수도 있다. 그러지 않더라도 우리는 이 원고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알아야 하는 사람들이다. 저작자를 발굴하여 관리하고, 원고를 개발하고, 책의 형태를 설계하고, 텍스트를 다루고, 책을 홍보하고, 매출과 손익을 따지는 일까지 편집자의 업무 영역 안에서 이루어진다. 이런 일이 적성에 맞는다면 할수록 만족스러운 일이 되지 않겠는가? 편집자는 시간이 많은 것을 하는 직업이다.

그러나 시간을 견디는 일은 결코 녹록지 않다. 역설적이게도 내가 만나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항상 아름다울 수 없기 때문이다. 내 포부가 좌절되는 일도 그만큼 많을 수밖에!

먼저 (그대, 신입 편집자여! 첫 5년이 오기 전에) 첫 2년이 관건이다. 베테랑 편집자가 되기 전에 누구나 출판사 조직을 경험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시절에는 회사의 목표가 나의 목표이다. 나는 내가 만들고 싶은 책을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회사가 만들어야 할 책을 회사가 가능하게 해 준 방식으로 만들어야 한다. 나는 회사에 내 노동을 팔았기 때문에. 게다가 회사가 가능하게 해 준 방식을 내 판단과 결정만으로 내 업무에 활용하게 해 줄 영향력은 처음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럴 권한은 스스로 만들어 가야 할 터인데, 말하자면 내가 만든 성과가 (한 권, 한 권의 책을 통해서!) 설득력을 보여야 서서히 갖춰지는 것이 이 권한이라는 것이다. 회사가 나를 믿을수록 내가 누리는 권한도 커진다. 회사가 나를 믿게 하려면? 나의 목표가 회사의 목표가 되게 하려면? (하, 그런 때는 생각하기도 싫지. 그런 때는 오지 않았으면 해.) 신입 편집자라면, 첫 2년의 업무 중 절반은 (사회생활에, 직장에) 적응하며 ‘견디는 것’이다. 그 이후도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지, 하고 싶은 일만 하는 날은 결코 오지 않는다. 오히려,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얼마나 안 할 수 있게 되었는가?’가 문제적이다. 왜? 우리의 일은 혼자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사표, 끝이 아니고 시작이거든

사표를 쓰자! 이렇게 결단을 하고 나면 모든 상황으로부터 벗어나 후련해지는 느낌이 들 것이다. 그간 나를 괴롭혔던 부장도, 실력 없는 팀장도, 뺀질이 동료도, 말 안 통하는 저자도, 변덕스러운 사장도 이제 나와는 끝이다. 내 사직서는 내가 그들에게 내리는 판결이다. 당신들 아웃! 내 인생에서 그만 나가 줘. 난 자유롭게 살 거야. 사직서만은 누구도 아닌 나의 권한이다. 이때야말로 이런 호기라야, 자연스럽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상황이 나쁘기만 한가? 그저 쉬고 싶은 건 아닌가? 어떤 사직서가 나쁜 까닭은 너무 지쳐 버린 상태가 되어서야 자포자기 상태로 내미는 처방이라는 것이다. 그 전에 사태를 바로잡으려 노력해 보지 않고 사표부터 내민다는 것이다. 이곳이 아니기만 하면 돼. 여긴 최악이야. 어디든 여기보단 나을걸? 또는 나는 정말 안 되는 인간이다. 난 능력 부족이야. 이 일이 안 맞는 걸까? …… 이런 낙담이 심정을 지배하는 상황이 되어서야, 쉬지 않고 일한 데다 몸도 마음도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판단력이 약해진 상태가 되어서야 문득 칼을 집어든다는 것이다. 왜 사표를 내기 전에 상황을 개선하려는 노력을 해 보지 못하는가? 그대, 그저 지쳐 버린 것 아닌가? 사표를 낼 게 아니라 휴가를 청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사표를 낸 것인가? 아니면 스스로 ‘잘린’ 것인가? 판단해야 한다.

사실 출판계는 이직률이 높은 편이다. 한동안 해마다 내게 다른 출판사의 명함을 주는 선배도 있었다. (첫 직장에서 20년 차를 맞은 친구도 있지만!) 이직률이 높다고 꼭 부정적으로 볼 것도 아니다. 왜? 출판사가 아무리 커도 일하는 단위(편집팀)는 4, 5명 이내인 경우가 많다. 2, 3명이서 일하기도 한다. 좋은 저작자와 작업할 수 없다든지 업무의 내용이나 처리 방식이 제한되어 있을 수도 있다. 근로조건이 좋지 않을 수도 있다. 직원인 편집자 자신의 근로조건만이 아니라, 저자나 거래처에 대한 대우가 나쁠 수도 있다. 그렇다. 우리는 좀 더 좋은 환경에서 일할 수 있어야 한다. 견디면서 함께 만들어 가려는 노력이 필요한 경우도 물론 있겠지만, 처우가 비인격적이거나 보수가 턱없이 낮다거나 아무리 해도 편집자의 권한을 존중받지 못한다면 그곳에 오래 있을 필요가 없다. 이 조직에선 발전이 없다, 의사결정이 불합리하다, 권한이 안 생긴다……. 견디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옮겨라. 더 나은 곳으로, 여기완 다른 곳으로. 갔다가 다시 돌아올지언정 떠나라. 그래 괜찮다, 사표를 써라!

이때, 사표는 끝내려고 쓰는 것이 아니고 새로 시작하기 위해 쓰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판을 읽어라. 나는 지금 어디에 있고, 어디로 가고 있는가? 어디로 가야 하는가? 일단 쉰다? 아니, 재취업은 쉽지 않다. 사표 이후에 더 나은 선택이 전제되어 있어야 의미가 있다. 순전히 자신의 의사만으로 결과를 이룰 수 있어서 가장 쉬워 보이는 선택이지만 녹초가 되기 전에 사태를 객관적으로 판단해야 한다. 의미 있는 매듭인가? 사표를 쓰는 이유가 타당한가? 그렇게 판단한 근거는 무엇인가? 주변에 조언을 구했는가? 적어도 5년 후의 커리어를 생각하고 자신의 판단을 돌아보자. 사표를 내기로 했다면 적극적으로 구직해라. 지극히 사적인 일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당신이 업계에 뿌리 내리는 일은 모두를 위한 일이다. 혼자 감당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과감히 주변에 도움을 청해라. 게다가, 모르시지 않을 텐데? 출판계 구인은 ‘알음알음’이다. 공개 채용 공고는 많지 않다.


거인들의 어깨 위로

“물 200밀리리터는 많은 양인가, 적은 양인가?” 기준을 어떻게 세우느냐에 따라 다른 답이 나온다. 이 회사는 좋은 회사인가? 나쁜 회사인가? 판단 기준을 어떻게 세우느냐에 따라 다른 답이 나온다. 판단 근거는 나 자신에게 있다. 다른 사람에겐 안 맞는 회사라도 나와는 맞을 수 있다. 반대로 나에겐 안 맞는 회사라도 다른 사람과는 맞을 수 있다. 그렇다고 완벽한 호흡으로 일할 곳이 있는가? 그런 곳은 어디에도 없다. 이직 준비를 잘해라. 들어갈 회사에 대한 정보를 최대한 모아라. 판단의 근거를 찾아라. 내가 왜 이 회사를 선택하는지에 스스로 답할 수 있어야 한다. 성급하게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이런 (좋은) 점이 가능하기에, 또는 이런 (나쁜) 점이 없기에……. 왜 이 회사에는 괜찮은 편집자가 없었을까? 뼈를 묻을 회사는 없다. 그래도 잦은 이직이 집중력을 떨어뜨리는 것은 사실이다. 최소 3년은 일해야 내가 만든 결과를 볼 수 있다. 3년은 일할 만한 회사인가? 일단 들어가서 적응하는 데만 한 달, 석 달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5년은 일한다”, “3년은 일한다”……. 들어갔다면, 견뎌라.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회사는 나를 지켜주는 곳이 아니라는 거다. 회사는 사정을 봐주지 않는다. 그럴 수 없다. 그러니 약점을 보이지 마라. 다정다감한 모습에 속지 마라. 그렇게 해야 회사와 잘 지낼 수 있다. 일할 때는 상처 받지 마라. 감정으로 일하지 말라는 뜻이다. 사태를 호불호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표지가 빨강인 이유: 제가 빨강을 좋아해서요!). 일은 취향이 아니다(아주 오래 하다 보면 그럴 수 있는 듯도 하던데!). 일에만 코를 박고 살지 마라. 적극적으로 할 수 있는 동적인 활동을 취미로 길러라. 다른 생각을 할 여지가 있어야 이 일을 즐길 수 있다. 혼자 있지 말고, 함께 일하는 사람들만 만나지 말고, 다양한 사람들 속으로 과감히 가라. 당신의 커리어에 회사 밖 네트워크가 중요하다. 일상적으로 공부해라. 책을 놓지 마라, 읽어라. 미래의 일에 ‘지금’을 담보로 쓰지 마라. 건강을 지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휴가를 찾아 써라. 그리고 회사를 떠나더라도 일과 사람을 잃지 마라. 갈수록 조금 더 과감히 일하되 너무 열심히 하지 마라. 열심히 하는 것보다 제대로 하는 것이 중요하다. 잘하려고 하지 마라. 잘하는 것보다 필요한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요령을 터득하고 자신만의 매뉴얼을 만들어서 갈수록 효율적으로 일하자.

편집자, 오래 할수록 일할 맛이 나는 직업이다. 멀리 넓게 내다보며 오래도록 일하시길 바란다. “큰나무 사이를 걸었더니 내 키가 커졌다”라는 말도 있다. 큰 사람, 좋은 사람이 있는 쪽으로 조금씩, 가라. 좋은 원고로 일해라. 일과 사람을 지켜라. 그러다 마침내 때때로 ‘거인들의 어깨’에 올라서라. 그러니 그래야 한다면, 사표를 써라. 아니, 입사지원서를 써라.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을 진정 ‘스스로 판단했다’는 것이다. 그랬으니 옳다. 저질러라. 건투를 빈다.(2016.05.12.)



덧글

댓글 입력 영역


AdSense